Tuesday, October 29, 2013

성장중심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담론 -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 (이원재) 제1편 : 탐욕에서 시작된 소득불평등, 더이상 아메리칸 드림이나 코리안 드림은 없다

제 1 편 - 탐욕에서 시작된 소득불평등, 더이상 아메리칸 드림이나 코리안 드림은 없다


항상 똑똑한 분들의 책을 읽어보는 일은 즐겁다.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있고, 논증이 있고 그것을 증명할 데이타가 있어 좋다.

요즘 우리 경제에서의 화두는 분명 '소득불균형 해소'이다.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어가고 있고, 일반적인 대중은 점점 가난해 지고 있다. 계층의 벽이 두터워 지고 있고 이에 따라 여러가지 부작용 등이 보고되어 우려를 낳게 한다. 이런 문제 때문에 정치권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한 활발한 대응책을 논의하며 지난 선거를 치루었다. 

여기 이러한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에 대해서 비평가적인 시각으로 담론을 펼친 분이 있으니 이원재님의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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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제목으로 시작하는 이 경제학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대한민국이 100명이 살고있는 마을이라고 가정할 때, 이중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인구는 59명이고, 이 중 정규직으로 고용되어 있는 인구는 28명이고 14명은 비정규직이다. 그리고 자영업자가 17명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정규직 28명 중 삼성전자 등 안정적인 제조업체에 직원으로 있는 인구는 단 1명이라는 것. 1차 협력업체까지 상장제조업 559개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만 그렇다는 것이다. 2000대 기업으로 확장해봐도 3명 남짓 밖에는 되지 않는 다는 것.

우리 사회는 그간 대표선수를 만들어 왔고 이들 삼성, 현대 등이 글로벌 시장에서 당당히 순위를 다투며 성장하며 나라의 경제발전도 이루었으나 그들의 차를 사주고 휴대폰을 사주었던 99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대표선수가 벌어들인 부라는 것이 분배가 되질 않고 그들만의 잔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화두로 이야기를 풀어나감에 거침이 없다. 우리가 신앙처럼 떠 받들고 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진행되어 오면서 나은 여러가지 현대 병폐를 통계적 수치로 들여다 보고 있다.

한국경제는 두 개로 나뉘어져 있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성벽이 세워져 있고, 그 성 안에는 수출 대기업과 이들을 보조하는 1차협력업체, 금융권, 컨설팅 등의 서비스, 공공부문이 있는데 이른바 '성벽 안 경제'이고, 이 네트워크에 정규직으로 고용되면 그나마 안정적인 고임금을 50대 초반까지 유지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 한다.

다른 하나는 그 나머지인 '성벽 바깥 경제'라고 표현하고 있다. 20대 초중반에 성벽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하다가 패배한 사람들이 여기에 속하며, 또 성벽 안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사업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기업가들, 50대 중반 이후의 인구의 대부분이 이 영역에 속해 있다고 보고 있다. 

성벽 안의 경제는 글로벌 경제이며, 문제는 여기서 만들어진 부가 성벽 안에서 맴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부가 사회에 배분되려면 인위적인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늘어나고는 있으나, 이런 것 만으로 근본적인 처방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은 성벽 안 사람도 성벽 바깥 사람도 모두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는 성벽 바깥 사람들은 저소득 상태이며 비정규직이고, 사업을 하고 있더라도 대부분 어쩔 수 없이 유지하는 영세 자영업이라 현재도 벅찰 뿐더러 미래에 대한 불안도 크지만, 성벽 안 사람들도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자리하고 있는 네트워크에서 추출될까 두려워 몰락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역시 동일하다는 것.

더우기 불안에 떠는 사람들은 할 수 있을 대 최대한 양식을 챙겨놓기 위해서 자존심 따위는 팽개치고 약탈적 경쟁에 나서기 때문에 부동산 투기, 사교육 열풍 등의 부작용이 나오고 있고, 이에 따라 발생된 현상이 2011년 말 쌓여 있는 가계부채가 900조원이 넘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보호받아야 할 성벽 바깥사람들까지도 성벽 안의 원칙을 따르도록 만드는 사회제도와 문화하고 역설한다.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사자와 소를 위한 하나의 법은 억압’이라고 했다. 성벽 안 사람과 성벽 바깥 사람을 같은 원리로 살아가도록 하면 안 된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시인의 말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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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자영업자들은 처음부터 실패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한다. 할 수 없이 성벽 안 경제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 통계조사를 근거로 들고 있다. 자영업자들이 결코 위험선호형이 아니라는 것이 그것이다. 질문은 아래와 같았다고 한다.

"응답자께서 지난 주말 하루 동안 다른 사람의 가게를 돌봐주었습니다. 다음 날 가게 주인이 이에 대한 대가를 10만원의 현금이나 즉석복권 중 하나로 지불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복권에 당첨됨으로써 얻게 되는 보상 및 당첨 확률이 다음과 같은 때 귀하께서는 현금과 즉석복권 중 어떤 것을 택하겠습니까?"

복권에 당첨됐을 때의 기대수익은 현금 10만원과 같은데, 50%의 확률로 당첨됐을 때 20만원을 받고, 50%의 확률로 '꽝'이었을 때 0원을 받는 식이며, 사실 확률을 따져보면 기대보상은 같은데 위험하더라도 돈을 좀 더 벌 수 있는 쪽을 선호하는 사람은 복권을 선택하고, 보상은 적더라도 안전한 쪽을 선호하는 사람은 현금을 선택하게 하는 질문구조였다.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고 이야기 한다.

연구진은 이 위험선호도를 응답자가 어떤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지와 비교해 분석했다. 그랬더니 정규직은 13.4%가 복권을 선호했다. 그런데 자영업자는 9.5%가 복권을 선호했다. 자영업자가 정규직 노동자보다 오히려 위험을 회피하는 성향을 보인 것이라는 것과 일용직 노동자도 9.2%가 복권을 선택해서, 자영업자와 비슷한 수준의 위험선호도를 보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자영업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라면, 상식적으로 자영업자는 정규직 노동자보다 더 위험선호적인 사람이어야 하고, 정규직으로 일하다 나와서 사업을 하는 경우라면 더 그럴 것인데, 결과는 반대였고 이에따라 한국의 자영업자들은 하고 싶지 않은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성안의 경제에서 성 밖으로 과하게 밀려나왔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경재이 치열해 지고, 전부가 살기가 팍팍한 상태가 되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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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양극화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저자는 '시장자본주의'의 구동력에서 찾는다. '탐욕'이라는 것이 인간을 지배하고, 호모이코노미쿠스의 본능에 따라 거품을 키우며, 경제를 양극화로 몰고 간다고 주장하고 있다.

작은 어업국가였던 아이슬란드가 월가의 금융시스템을 받아들이면서 자국민으로 하여금 시장자본주의의 탐욕으로 이끌다가 거품 붕괴로 주저 앉았고, 아일랜드 역시 탐욕의 시스템 도입으로 구제금융 신청이라는 패전의 길로 들어섰다라고 이야기 한다.

한국 역시 이러한 탐욕의 시스템이 진행되고 있으며, 개방과 시장주의의 득세로 국민의 탐욕에 불을 지피고 경제성장을 해왔다고 주장한다.

기본적으로 저자의 입장은 '탐욕'으로 얻어진 부가 일자리를 통해 사회에 분배가 되지 않고 있고, 이는 경제학의 기본 가정이 무너진 것이라 역설한다. 어떤 방법이든 경제학에서는 쌓여진 부는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통하여 분배를 하게 되는 시스템인데, 현재는 그러한 시스템이 붕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존 성장방식을 지탱하던 가정이 무너졌다고 표현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미국이 100명의 마을이라고 해보자. 그 100명을 소득이 많은 사람부터 한 줄로 세워보자.  
맨 앞에 선 한 명을 주목하자. 이 사람의 소득은 1979년 이후 30년 만에 3.7배로 늘었다. 이 사람의 연간 소득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 30년 동안 10분의 1에서 4분의 1로 커졌다. 
2008년 금융위기 이전 5년 동안 미국에서 생겨난 모든 소득 가운데 3분의 2가 이 한사람에게 집중됐다. 소득 뿐 아니라 자산도 집중되어 있다. 이 한 사람은 100명이 보유한 자산 전체의 3분의 1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 이 사람이 바로 미국의 1%다. 
이번에는 100명이 선 줄에서 한가운데인 50번째에 있는 사람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이 사람이 속한 가정이 2010년 연간 벌어들인 돈은 4만9445달러다. 이 사람의 소득은 1999년 이후 늘 5만 달러가 넘었는데, 10년만에 그 아래로 떨어졌다. 그 10년 동안 이사람의 소득은 꾸준히 떨어졌다. 상시 근로자로 취업한 남성들만 한 줄로 세워보면 사정은 더 나쁘다. 한가운데 있는 남성의 소득은 1978년 수준에도 못 미친다. 30년, 또는 10년 동안 이 사람의 경제는 발전하기는 커녕 오히려 가난해졌다. 이 사람이 바로 미국의 중산층이다. 
1%는 점점 더 벌고, 중산층은 내려앉아 빈곤층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 경제는 계속 성장중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제1위 경제대국이다.
1972년부터 2001년까지 30년 동안 미국의 1인당 GDP는 70% 이상 늘었다. 지난 10년간 미국의 상품 및 서비스 생산을 19% 증가했다. 기업이익(금융 제외)도 85%가 늘어 두 배 가까이로 커졌다. 평균소득도 생산도 기업이익도 늘었다. 
그런데, 가계 중위소득도, 평균적인 노동자의 실질임금도 줄었다. 소득 상위 10%도 별로 부유해지지 않았다. 소득이 연평균 1%만 늘어났다. 그런데 최상위 1%는 180%가 늘었다. 최상위 0.1%의 소득은 무려 여섯 배로 커졌다. 
경제는 성장하는데 사람들은 가난한 상태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현상은 그 시각을 미국에서 세계로 확대해도 결과는 비슷하다고 한다.

스위스의 크레딧스위스은행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100만 달러 이상의 자산을 가진 부자는 2970만 명이다. 세계 인구의 0.5% 가량 된다. 그런데 이들이 가진 부의 총액은 89조 달러로, 세계 전체의 38.5%나 된다. 불평등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통계적인 사실이며, 현재 미국과 세계의 모습이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이들은 1%가 만들어낸 탐욕의 질서를 닮고자 인생을 바쳐 노력했고, 결국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지만 그 기대가 무너졌으며, 탐욕과 경쟁을 통해 치열하게 얻어낸 성장이지만, 그 과실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1%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시만, 미국이 처음부터 이렇게 불평등한 사회는 아니었고, 미국 경제역사 중 최고의 성장기이자 안정기였던 1950~70년대에는 폴 크루그먼 교수가 이야기 했던 대압착시대이며, 비교적 평등한 사회 였다고 한다.

물론 미국이 처음부터 이렇게 불평등이 심각했던 것은 아니다. 늘 그랬다면 '아메리칸 드림'이 그만큼 자리를 잡지도 못했을 것이다. 1929년 대공황을 맞기 이전의 미국은 부와 권력의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였다. 하지만 대공황 이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을 시작으로 상대적으로 평등한 중산층 중심의 경제로 빠르게 변화한다. 케네디 대통령도 이 시기 재임했고, '아메리칸 드림'도 이 시기에 꽃을 피웠다. 지금의 불평등이 다시 시작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중산층이 늘어 사회평균이 상향된 시기인 뉴딜정책 시대에는 조세한도가 높았고, 노동운동이 활발했던 시대라고 이야기 한다. 노조활동을 막기 위해 사측에서는 최저임금을 개선하고, 보다 많은 혜택을 노동자들에게 부여하면서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의 임금격차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폴 크루그먼 교수도 '노동조합의 확장은 증세와 함께 대압착 시대 미국 경제 번영의 동력'이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이 시기의 미국 경제는 번영을 구가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정치 역시 과거 1920년대의 극단성을 떠나 이때는 공화당 민주당이 비슷한 목소리를 내었으며, 복지친화적이었다고 한다. 시장만능주의를 외치던 보수주의가 1950년대 들어 사회보장제도와 소득재분배에 대하여 공화당과 민주당이 한목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1980년대 레이건 정부로 부터 시작하여 바통을 이어받은 부시 정부까지 기업활성화의 기치를 내걸고 시행한 감세 정책 등으로 1970년대까지 완성된 중산층의 시대가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의 논리는 '공급주의 경제학'.

공급주의 경제학에 대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이 경제학이 기대했던 낙수효과는 없었다고 이야기 한다.

공급주의 경제학은 부자의 세금을 낮추면 저축과 투자가 늘어나고 경제가 성장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시장의 힘으로 소득이 분배되어 저소득층도 혜택을 본다는 것이다. 이른바 '낙수효과', '트리클 다운 효과'다. 이 효과를 믿은 레이건 정부는, 1950년대 최소 90%까지 갔던 소득세 최고세율은 39%까지 떨어뜨렸다. 상속세 폐지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분배 상태 악화였다. 최상위층에게 혜택이 집중되었지만, 그 아래 계층으로 흘러 내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낙수효과를 기대하고 감세 등 여러 경제활성화 조치를 취했지만, 벌어진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1950~60년대 미국은 불평등이 매우 낮은 시기였다. 복지국가와 강력한 노동조합이 만나 번영을 이룬 개혁자본주의 시대였다. 이때 성장도 빨랐다. 미국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시기였다. 거꾸로 1980년대 이후의 미국은 불평등이 점점 커지는 시기다. 소득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고, 경제 성장은 부침이 있었지만 결국 금융위기를 맞는 것으로 귀결됐다. 어떻게 비교하더라도 불평등의 시대는 대압착 시대를 넘어설 수 없다.
왜 그랬을까?
자본주의는 출발 조건이 평등할수록 빨리 성장하는 체제다. 모두가 같은 선에 서서 출발해야 빨리 달릴 유인이 생긴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데, 세명은 10미터 앞에서 출발하고 일곱명은 100미터를 모두 뛰어야 한다면, 그 일곱명이 열심히 달릴 이유는 없다.
처음 같은 선에서 출발해도, 문제는 성장한 뒤에 다시 나타난다. 보수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 성장이 자동적으로 평등한 분배를 낳는다고 역설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정부나 사회의 힘이 개입되지 않고는 분배가 일어나지 않았다. ~ 자본주의 경제에서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낳는다. 시장의 힘에 모든 것을 맡겨 놓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 불평등은 다시 경제 위기로 연결된다.

결국 기회가 불평등하게 되면 힘껏 뛰어야 하는 동인이 없어지게 되고, 이 불평등은 다시 경제 위기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미국의 사례를 우리나라 현실로 가져왔을 때에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 역시 전후 가난했지만 평등한 출발선에서 시작했다. 대부분의 이들이 동일한 출발선에서 출발하여 급속도의 발전을 일구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성숙되는 과정에서 부의 재분배 시스템의 문제가 감지되었고, 지금은 여러 통계치에서도 사회적 부의 편중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단다. 다시금 '평탄화 작업'이 이루어져야 다시 성장이 가능한 시기가 왔다고 역설한다. 미국의 사례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라는 것이다.

사실 자본의 탐욕은 꼭 나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러한 탐욕이 동인이 되어 많은 경제주체들을 뛰게 한다. 초과수익이 없다면 자본은 움직이지 않으며 움직일 필요도 없다. 하지만, 진행과정에서 창출되는 성장의 과실이 소수 상위에게만 집중된다면 분명 어딘가 고장이 난 시스템일 것이다. 이러한 성장의 과실이 일자리 창출이든 뭐가 되었든 각 경제주체에 골고루 분배될 수 있는 어떤 해결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제2편에서는 기존 경제학 이론에 빗대어 현실 경제문제를 타개할 방법을 찾아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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